*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병해서 이제 잉글랜드를 영국이라고 부름
2015/01/06 - [분류 전체보기] - 설탕 이야기
설탕 삼각무역으로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18세기에 접어들어 아메리카 곳곳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주도권 쟁탈전이 격화되어
7년 전쟁(1756~1763)이 벌어지고 영국은 겨우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전비를 조달하느라 막대한 부채가 생기자 영국 총리 그렌빌은 설탕에 손을 댄다
1764년 영국 의회에서 설탕법이 통과되어 이전의 당밀법을 대체하고 관세부과에 대한 집행과 밀수단속을 강화
사실상 식민지 사업자들의 이윤을 줄이고 그만큼 영국 본국의 세입을 늘리려는 조치였기 때문에
7년 전쟁 때 영국 편을 들어 뼈빠지게 싸웠지만 돌아 오는 것은 뒤통수라는 것에 식민지인들은 분노했고
1년 뒤 인지세법마저 통과되면서 본국에 대한 반감이 급속도로 확산, 미국 독립전쟁을 향한 불씨가 서서히 타오른다
그 정도로 당시 식민지 사람들에게 설탕 산업이 중요한 의미였다
카리브 해의 설탕 산출량이 증가하면서 가격도 차차 인하되어 설탕을 접하는 서민계층이 늘어났고
유럽, 특히 영국의 설탕 소비량은 폭증했다.. 예를 들면 1770년 영국의 소비량은 1710년에 비해 5배 증가했는데,
그 와중에도 사탕수수를 대체할 원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1747년 독일의 안드레아스 마르그라프가 사탕무에서 설탕을 정제하는 데 성공
정제법 발견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후 프랑스의 주요 설탕 산지이던 아이티가 투쟁 끝에 독립하고
제해권을 영국이 장악하는 바람에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 공급이 곤란해지자
나폴레옹이 직접 나서 사탕무 정제공장을 세우도록 지시하면서
기존의 설탕 관련 사업자들은 사탕무의 효용성에 주목하게 된다
사탕무는 사탕수수와 달리 대부분의 유럽지역에서 잘 자랐고(현재 러시아가 사탕무 생산량 1위)
그 때문에 사탕수수 산지를 식민지로 가지지 못한 나라들도 사탕무의 정제사업에 뛰어들면서
사탕무를 통한 설탕 정제량은 급증하여 1854년에 세계 설탕 원료의 약 11%가 사탕무였고
1899년에는 약 65%까지 늘어났다 (경제성 문제로 점유율이 감소하여 현재는 세계 설탕원료의 약 20%를 충당하고 있다)
사탕수수만이 설탕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던 시대는 저물었지만
여전히 사탕수수는 설탕의 주요 원료였는데
사탕수수를 심을 수 있는 식민지가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는 제국주의의 시대..
세계의 열강들은 앞다투어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고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 사탕수수를 심을 만한 식민지가 더욱 늘어나
이제 사탕수수는 카리브 해나 브라질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산출되는 히트상품이 된다
한편 1879년에는 미국의 콘스탄틴 팰버그가 인공적으로 사카린을 만드는 데 성공하고
설탕 대체물로서 사카린은 조금씩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는데..
이제 더 이상 설탕은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누구나 설탕을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설탕의 인기는 끝이 없었고
칼로리 소모가 많은 산업노동자들에게도 설탕은 필수식품이었다
이 사람들은 주로 홍차에 설탕을 넣어 마셨는데
홍차의 카페인과 설탕의 높은 칼로리는 고된 노동을 위한 동반자나 마찬가지였고
특히 대영제국의 아침은 설탕 넣은 홍차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0년에 이르면 영국 성인의 하루 칼로리 섭취량의 1/5이 설탕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영국인은 설탕을 좋아했다..
산업시대에 접어들면서 설탕은 더욱 그 활용범위를 넓혀
과자, 케이크, 과일절임, 각종 요리, 잼, 통조림, 시리얼, 오트밀 죽 등 일반 가정의 다양한 요리에 활용되었는데
그냥 먹어도 좋고 차에 넣어도 좋고 먹거리에 넣어도 좋았기에
설탕이라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환장했다..
특히 그 즈음 소비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던 초콜릿과 사탕도 설탕 소비량의 증가에 기여했는데.
그 결과 1800년 세계 설탕 생산량은 24만 5천 톤이었으나 1890년에는 600만 톤에 도달한다. (물론 이후로도 계속 증가)
한편 19세기의 설탕산업에 일어난 중대한 변화가 하나 있었다
노예가 해방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은 노예노동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인권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노예 해방운동이 활발해져
1833년 영국을 시작으로 세계적으로 점점 노예제가 폐지되기 시작하면서
이제 노예를 밤낮으로 굴려서 사탕수수 생산량을 늘리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노동계약을 체결하여 정식으로 노동자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고
각국은 노예를 대체할 노동력 확보에 혈안이 되었다
주로 임금 낮은 아시아 쪽에서 많이 데려왔는데
특히 영국의 경우 인도에서 주로 그 노동력을 조달했다
남아프리카에도 약 10만 명의 인도인이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 노동자로 수송되었고
그곳에서 수많은 가혹행위와 불합리한 노동조건, 부당한 대우를 목격한
어느 인도인 변호사는 차별받는 인도인을 위한 인권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가 바로 마하트마 간디
후일 인도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한편 설탕은 양에 비해 높은 칼로리와 다양한 활용성 때문에
중요한 군수물자로 자리잡았고
그 때문에 1차 세계대전 중 유럽 국가들은 심각한 설탕부족 사태에 직면했는데
이때 구원투수로 사카린이 등판하면서 급속도로 알려지고 설탕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값도 저렴하고 0kcal라는 특성상 다이어트를 원하는 수많은 소비자들이 즐겨 찾으면서 1960년대까지 절정을 구가했지만
1970년대 사카린의 인체유해성 논란이 격화됐고
마침 사카린을 투여한 쥐에 암이 발병했다는 연구결과가 등장하자
FDA에 의해 발암물질로 지목받아 인기가 주춤하고
결국 2000년에야 그 누명을 벗는다..
(쥐와 달리 사람에게서는 암이 투여된다는 증거가 끝내 발견되지 않았음)
그러나 1950년대 이후에 과학자들은 계속해서 설탕을 대체할 합성감미료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여
아스파탐, 수크랄로스, 고과당 옥수수시럽(액상과당의 일종)이 등장하고
특히 아스파탐과 수크랄로스의 경우, 사카린처럼 0kcal라는 강점을 선보이며 소비자들의 이목을 끌었고
때맞춰 설탕의 건강 유해성에 대한 연구자료가 계속해서 쏟아지면서
설탕이 사용되던 일부 제품은 이들로 대체되어 오늘에 이른다
고과당 옥수수시럽의 경우 1977년부터 미국이 설탕 관세를 올리는 바람에
설탕보다 더 값싼 원료를 찾아헤매던 일부 식품기업들은 설탕에서 고과당 옥수수시럽으로 갈아탔고
특히 코카콜라의 경우 1984년부터 미국에서는 고과당 옥수수시럽을 설탕 대용으로 사용하게 된다
(물론 멕시코처럼 코카콜라에 고과당 옥수수시럽 안 쓰는 나라도 있음)
그렇지만 그것이 설탕의 몰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합성감미료들의 추격이 거세지던 1972년에도
네덜란드, 덴마크, 영국 등 주요 유럽국 국민들의 1일 평균 설탕 소비량은 135g에 달했고
이후 21세기에 이르러 현재 전세계 사람들의 1인당 연간 설탕 소비량은 평균 22.1kg
특히 한국의 경우도 1인당 연간 설탕소비량이 23.7kg이므로
여전히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설탕을 빼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탕수수의 여정은 고대 인도로부터 시작되어 이슬람과 유럽이 확장했던 역사의 순간들을 따라다녔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었던 설탕은
오늘날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먹거리가 되었고
합성감미료의 등장으로 설탕의 절대적 지위가 흔들린 건 사실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설탕은 수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